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휴이 롱 (문단 편집) == 가족 == 휴이 롱 사후 유족들은 루이지애나 정계를 주름잡는 거물 가문이 된다. 휴이 롱의 아내 로즈 맥코넬(Rose McConnell Long)은 휴이 롱의 사후 연방 상원의원 직을 다음 상원의원 선거까지 1년 대리하게 되는데, 미국 역사 상 두번째 여성 상원의원으로 이름을 남겼다. 휴이 롱의 동생 [[얼 롱]](Earl Long)은 [[그라쿠스 형제]]마냥, 휴이 롱이 죽은 뒤 형에게 보내는 동정표로 정계에 진출했다. [[1939년]] 루이지애나 주지사 보궐선거, [[1948년]]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, [[1956년]]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된다. 그리고 얼 롱은 보란듯이 휴이 롱보다 더 강경한 진보정책을 밀어 붙였다. 실제로 얼 롱이 활동하던 기간 동안 미국 정계는 이들을 '그라쿠스 형제의 미국판'이라고 불렀다. [[1960년]] 얼 롱은 주지사직이 만료되자 [[미국 하원]]의원 선거에 출마했다. 그러나 [[1960년]] [[9월 5일]] 선거 유세 도중에 급성 [[심장마비]]로 쓰러져 65살로 사망했다. 이 때문에 얼 롱이 죽었을 때 휴이 롱처럼 반대파에서 [[암살]]한 게 아닌가 하는 [[음모론]]이 끊이지 않았다[* 물론 당시 롱의 상태는 불륜으로 인한 이혼 위기, 정신병, 주지사 임기제한 철폐를 둔 주 대법원과의 갈등등으로 심신이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고, 65세 자체가 그리 젊은 나이가 아닌 만큼 사망한게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.]. 휴이 롱의 아들 [[러셀 B. 롱]] 또한 [[1948년]] 처음으로 루이지애나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돼서 [[1987년]]까지 재임했다. 무려 6선 상원의원. 상원 원내총무까지 역임한 바 있다. 아버지랑은 달리 현실적인 자세로 친기업적, 외교 개입주의 성향을 보여주었다. 노조나 인종문제[* 초기에는 남부출신 의원으로 인종 분리주의 정책에 찬성하고 1964년 연방민권법에 반대표를 던졌다. 하지만 유색인종들을 직원으로 고용하고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.] 에 있어서도 중도적이었다. 사촌들인 길리스, [[스피디 롱|스피디]]는 루이지애나 주 연방하원의원을 역임한 바 있고, 이외에도 주의회 의원이나 기타 공직을 맡은 인물은 더 많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